드래그 온 드라군3 설정집에 있는 드래그 온 드라군1.3 소설 번역입니다.
시간열은 DOD3의 A분기 > YOUNG GANGAN에 연재된 만화 '드래그 온 드라군 죽음에 이르는 적색'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무인판 드래그 온 드라군과는 설정이 조금 다릅니다.
A_0010 진홍의 용(1/3)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임오라버님.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어리게 들렸다. 그래서 금방 환청이라는 걸 깨달았다. 프리아에가 혀짧은 목소리를 내던 건 이미 십년도 전의 일이다.
애시당초 여기에 프리아에가 있을리가 없었다. 여름철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들어올 수 없는 험한 산이다. 겨울이라면 사람은 물론, 생명이 있는 것은 철저히 거부된다. 새나 맹수는 말 할 것도 없고 풀이나 나무조차도. 유일한 예외는 산의 정상에 살고 있다는 드래곤이라고 한다.
그 설산을 사람의 몸으로 도전하다니 무모의 끝을 달리고 있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여기에 있을리 없는 여동생의, 그것도 어릴 적의 목소리를 들은 지금.
도를 넘어버린 추위가 체온뿐만 아니라 사고능력까지 앗아갈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수많은 병사들이 제정신을 잃어갔다. 누군가는 생전 처음듣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고, 누군가는 소란스럽게 웃더니 갑자기 오열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그 직후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극한의 땅에서 광기는 죽음의 징조라고 한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들릴 리 없는 여동생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죽음이 무서운게 아니라 무엇하나 해내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난 다는 것이.
환청의 다음은 뭘까? 환각일까?
"기다려주십시오……. 카임…님……."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바로 뒤를 걷고 있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입이 얼어서 그런건지, 그것은 부자연스럽게 끊기고 목소리 톤도 일정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목소리는 이거였구나,하고 눈치챈다. 떨리는 목소리가 타이밍 좋게 강풍을 타서 어린 여자아이 같은 혀짧은 목소리 같이 들린 것이다.
아직 괜찮다. 나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발을 멈추지 마라!"
카임은 앞을 본 채로 소리쳤다. 멈춰버리면 두번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하나가, 또 하나가 줄어 이십몇 명이던 병사들이 지금은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살아남아있는 건 자신과 뒤를 걷고 있는 병사 둘 뿐일지도 모른다. 다른 세 명의 목소리를 들은 지 시간이 꽤 지났다.
그렇다고해서 생사를 확인할 수도 없다. 되돌아가는 것은 커녕 뒤를 돌아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몸의 방향을 조금 트는 것만으로 방향을 잃어버릴 때니까.
아니 방향따윈 이미 잃어버렸다. 아까부터 '앞'이라고 생각되는 쪽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같은 장소를 돌고 있는건지 이제와서 판단할 수도 없다.
시야는 언제까지고 새하얗다. 주위의 상태는 물론이고 팔을 뻗으면 그조차 하얗게 섞여서 보이지 않았다. 낙하하지 않고 험한 산길을 오르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으로 생각될 정도다.
살고 있던 나라에서 본 눈과는 전혀 다르다. 내륙에 위치한 칼레온은 따뜻한 기후라고 할 수 없었으며, 겨울이 되면 눈이 내렸다. 사람과 말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의 폭설에 시달린 해도 있었다. 그러나 눈은 그저 눈, 아무리 강하고 차갑더라도 바람은 그저 바람이었다.
눈이 사람의 피부를 태우는 불이 될 수도 있고, 바람이 팔다리에 박혀 찢을 정도의 칼날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산에서 처음 깨달았다.
언제까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걸을 수 있을까?
드래곤이 산다는 동굴에 도달할 수는 있을까? 만약 도달했다고해도 사고능력을 제대로 가지고 있을까?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드래곤을 상대로 대화와 교섭을 해야한다. 도착했다고 끝나는게 아니다.
사람의 몸으로 설산에 들어오는 것보다 사람의 몸으로 드래곤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쪽이 훨씬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한 병사들조차 쓰러져가는 것을 눈 앞에서 본 지금은 어느쪽이 더 어리석은 지 판단할 수 없다.
"만약 무모의 끝이라고 해도,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제국은 그 정도로 위협적이오."
과장스러운 어투의 하급신관의 얼굴이 잠깐 떠오른다. 모든 것의 발단이자, 어쩌면 원흉일지도 모르는 그 남자가.
제국. 그들이 그렇게 명명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연합군이 편의상 붙인 호칭일 뿐이다.
연합군은 '천사의 교회'가 이끄는 군대를 제국군이라고 불렀다. '냉정하기 짝이없는 독재자가 쌓아올린 악의 제국'이라면서.
사실상 독재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제국군이나 '천사의 교회'의 내정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끌고 있는 자의 인격을 포함하여 남녀의 구별조차도. 복수의 지도자로 이루어진 합의제로 이루어져 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고 선언하기에 '독재자'나 '악의 제국' 따위의 단어는 딱 좋았다.
그러나 정의가 어느 쪽이든간에 제국군의 기세는 하루가 멀다하고 강해지고 있었다. 연합군이 설 땅은 점점 작아지고만 있었으니 하급신관이 말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건 결코 과장도, 비관적인 것도 아니었다.
최근 연합군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느 전선에서도 병사들의 사기는 땅을 향해갔다. 제국병은 괴물이라는 소문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같은 붉은 눈에,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그 모습. 팔을 잘라도, 흘깃봐도 치명상이 분명한 상처를 입고 있어도, 절대로 검을 놓지 않고 어디까지나 맞서온다.
대치하던 병사들이 그 귀신같은 모습에 겁먹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 도망가려 하는 자도 끝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하오. 약해진 병사들의 용기를 부추기고, 전황을 뒤집을 힘이! 기사회생의 한 수가!"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거지?"
카임은 벨드레라는 하급신관의 허풍스러운 말투에 슬슬 질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붉은 눈의 제국병사들을 앞에 두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용병대장이 있다고 들었소. 고대의 군신같은 전투, 그 용감무쌍한 모습은 아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고."
"과대평가다. 그리고 난 대장이 아니야."
출신을 알고 있는 자들이 '카임님, 카임님.'하고 쓸데없이 떠받드는 건 맞지만 그들을 이끌 마음은 없다. 조국이 사라진 지금, 왕족이라는 신분도 과거의 것이다.
다만 좋든 싫든간에 카임은 '칼레온의 생존자'였다. 검은 용이 국왕부부를 참살하고, 붉은 눈의 괴물들이 왕궁에서 생겨나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덮친 5년전 사건의 생존자.
나라 하나를 없애버린 재앙에서 살아남았다고하니 자신들도 그 강운의 영향을 받고 싶은 거겠지. 병사들이 카임의 밑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전장은 조금의 운과 만남이 생사가 나뉘어진다.
이끌 마음은 없지만 아군의 병사들을 굳이 쫓아내지도 않았으니 어느샌가 전장에서는 카임의 주변에 병사들이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카임과 함께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아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것'처럼 보인거겠지.
제국병사들을 앞에 두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도 맞기는 맞다. 카임이 용병이라는 신분을 선택한 목적은 붉은 눈의 괴물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조국을 붕괴시킨 괴물을 전멸시킨다.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떤 일이 있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눈 앞에 제국병이 있는 이상, 만에 하나 전군 대피명령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병사들을 이끌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정규군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자신의 행위가 '전투'가 아니라 단순한 '살육'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저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전장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살인광이 병사들의 목숨을 맡는다니 농담도 정도껏해야지.
"그대가 대장이든 아니든 상관없소. 이 임무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그 뒤를 듣지 않아도 답은 정해져있었다. 거절한다. 제국병을 죽이는 것 외에 낭비할 시간도 노동력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용족과 동맹을 맺는 것이오."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언가 밑도 끝도 없이 멍청한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제국병이 사람을 벗어난 괴물이라면 이 쪽도 사람을 벗어난 힘으로 대항하면 되는 것."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도록."
허황된 말을 받아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는 않는다. 용족과 동맹? 바보같다.
"사람을 들이지 않는 험한 산의 정상에 용이 산다고 하오. 그걸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소?"
앞을 가로막듯이 벨드레가 나를 저지해온다. 한편으로는 소심해보이지만 사실 방심하면 안되는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게 어떤 용인지는 모르오. 창궁의 날개를 가진 용인지, 백은의 비늘이 덮인 용인지. 허나"
벨드레의 양 눈이 교활한 빛을 발했다.
"거기에 사는 것이 검은 용이라면 그대의 마음대로 하시오."
검은 용. 5년 전, 왕궁의 안뜰에 내려와 양친을 참살한 검은 재앙. 붉은 눈의 놈들을 증오하는 만큼 검은 용을 증오하고 있다. 붉은 눈의 제국병들과 똑같이 검은 용을 베어 조각내고 싶었다.
"엄선한 병사를 부하로 붙여주겠소. 그들과 함께 검은 용을 쓰러뜨리시오. 그대의 양친의 원수를."
"만약 그게 다른 용이라면?"
"그 때에는 교섭자로서 그 용에게 동맹을 요청해주시오. 그대의 원수는 검은 용 뿐이지않소?"
그리고 벨드레는 산의 이름을 말했다. 들은 적이 있었다. 칼레온과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떨어져있는 것도 아니다. 날개를 가진 자라면 쉽사리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사는 것은 정말 그 용일지도 모른다.
"검은 용을 죽이면 다른 용들도 적이 될 지도 모른다. 놈들에게 동료의식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동맹은 말도 못 꺼내게 되겠지. 그래도 좋은건가?"
"어쩔 수 없소. 그 설산에 도전하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데, 그 정도로 위험한 임무에 견줄 보상은 없으리다."
"알았다."
검은 용이라면 죽인다. 다른 용이라면 동맹의 의사를 전한다. 단순명쾌한 거래였다.
"오오! 받아주시는 건가! 고맙소! 우리와 용족이 동맹을 맺는 날에는 그대에게 기사로서의 명예와 칭호를……."
벨드레가 다시 연극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지만 카임은 그저 흘려들으며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