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로그B's log 수록 클락 제로CLOCK ZERO 오리지널 단편 연재기획 토키타 슈야편 번역
!) 주인공 이름은 디폴트입니다.
옛날 잡지들 일부만 잘라두고 그대로 버렸더니 정확히 몇 호에서 나온건지 모르겠네요.
PS2인거보니까 2010년에 나온건 알겠는데....
CLOCK ZERO Original SS 「느릿하게 다가오는 종언」(1/1)
팔랑팔랑.
천초빛으로 물든 잎이 유유하게 시간을 새기듯 흩날리며 떨어졌다.
둥실둥실.
실과자같은 담운이 바람에 흔들려 맑은 청공을 떠다녔다.
(늦가을,이로구나.)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걸린 상쾌한 오후. 토키타 슈야는 교실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속으로 스며든 변화에 천천히 눈이 가늘어졌다. 계절은 이미 늦가을이라고 할 시기였다. 창밖의 정원은 가지에서 떨어진 붉은 잎들로 물들어있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신록이 아름다웠는데. 어느새 다른 색으로 변해버린건지.)
느긋해보이는 계절의 변화는, 확실하게 시간을 새기는 요소였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속도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시간을 나타낸다면 좋을텐데, 하고 슈야는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해서 시간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새에 지나가버린다.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그리고 사람은 후회한다. 어째서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귀하게 여기지않은건지. 일분일초라도 길게――현재를 소중하게 살지 않았던건가.)
머무는 것따윈 용서받지 못한다. 누구라도, 어떤 생물이라도 시간을 보내어 성장하고 시들어간다. 그 원리가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지금의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것이니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얼버부리려해도 감정을 가지고, 후회할 수 밖에 없는 것도 또한 인간이었다.
(……나는 머물고 싶다고 바라고있는 것일까.)
구름은 여유롭게 떠다녔다. 시간은 끊이지 않고 움직여 조금 전과 같은 풍경은 두번다시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실을 괴롭게 생각하는 듯, 슈야는 그저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눈에 새겼다.
"――저기, 말 걸어보는게 좋지않을까?"
"뭐, 그치만……엄청 우울해보이는 걸. 말 걸기 좀 그래."
"하―……그래도 진짜 그림 같다. 저기만 다른 공간이야."
"흩날리는 나뭇잎에, 감상에 빠진 미소년……. 시적인걸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슈야니까 아무 생각 없을 걸……."
"그것보다 선생님 화나셨는데. 슬슬 불러야하지않아?"
시간은 오후 한 시 반. 태양빛이 따뜻해서 수업같은 건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특히 이 시간대는 점심시간 후라는 것도 있어서 수업에 집중이 안된다고 불만을 내뱉는 학생들도 많다.
――그러나 토키야 슈야는 항상 이런 상태였다.
"――토키타군."
(……음. 정원에 고양이가 들어와있군. 이따 가보도록할까……)
"토키타군! 듣고 있어요?!"
(그러고보니, 오늘 방과후에 뭐가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토키타 슈야군!!"
쾅! 하고 눈 앞에서 큰소리가 나자 슈야는 눈을 깜빡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책상을 교과서인지 뭔지로 내리친 것 같은 교사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렀나?"
"네. 몇 번이나 불렀어요. 토키타군, 교과서라도 꺼내주실래요?"
분노를 참고 있는 것도 같고, 당혹스러움에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것도 같은 얼굴을 한 여성 교사가 말을 전하자, 슈야는 기운없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교사는 본 적이 있다. 그녀의 담당과목은 영어일 것이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전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 교시가 바뀔 정도로 시간이 지난건지. 그러고보니 점심시간이 끼어있던 것 같기도하다.
"하나만 묻지, 내가 꺼낼 것은 영어 교과서가 맞는가?"
"…………큭, 당연하죠. 지금은 영어시간이에요."
――역시 그런가보다. 조금 전까지 노년에 막 접어든 교사가 읽던 옛 가곡―그건 딱 늦가을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노래였다―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창밖의 풍경에 '아주 조금' 눈을 빼앗긴 건 뿐이다.
"……미안하군. 그대의 수업을 가벼이 여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과하지."
"…………."
솔직하게 사과하자, 관자놀이를 떨고있던 교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교탁으로 돌아갔다.
교실의 구석에서 '진짜 입만 안 열면 미남인데.'하고 한탄인지 빈정거리는건지 모를 목소리가 났지만, 슈야의 귀에 닿는 일은 없었다.
――슈야는 시간의 흐름이란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슈야에게 '아주 잠깐'은, 왜인지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과 달랐다. 물론 그건 단순히 그가 남들보다 배로 멍한 성격인 것 뿐이지만――.
"슈야, 어디가?"
"……음?"
문득 귀에 들어온 자신의 이름. 그 울림에 뒤를 돌아보자 복도 앞에 쿠로 나데시코가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볼때면 슈야의 가슴 안쪽에서 가시가 꿈틀거리듯이 아파온다.
그 가시에는 '죄악감'이라는 이름이 붙는다는 것도 지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어디라니…… 흠, 어디였던가."
"자기가 가려고 했던 곳을 기억 못하는거야?"
"다음 수업이 이동수업이라. 오오, 옳지. 음악실에 가는 중이었다."
"……슈야. 지금은 벌써 방과후야."
"뭐라?"
짧은 침묵이 흘렀다. 슈야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흐릿하던 사고가, 요즘은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지식도, 사고도, 감정도――기억도.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해야 하는 것도 해야하는 것도, 지금의 슈야에게는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평소보다도 더 사고가 멍하다는 자각이 있다. 마치 생각하는 것을 거절하는 듯이, 사고가 느릿하게 정체되고 있는 것이다.
(머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허나…….)
"오늘은 평소보다 더 멍하네. 괜찮아?"
"……가을이 끝난다."
"응?"
"곧 가을이 끝나버린다. 오늘은 하루종일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째서 쓸쓸하다고 생각하는지……."
"슈야?"
세간에서는 흔히 나뭇잎이나 벌레 울음소리가 사라지는 가을을 쓸쓸하다고 말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의 쓸쓸함. 그 앞에 '무無'가 기다리고있는 것 같은 불안함. 그런 것에 사로잡힐 것만 같다. 불안을 뱉어내고 나데시코의 팔을 힘없이 붙잡았다. 그녀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슈야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과제일이야. 그것도 잊었어?"
"음. ……아니, 그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 오늘은 특별수업이 있는 날이다."
"다행이다. 그럼 이제 가자. 모두 슈야가 안 오니까 걱정하고 있어."
"그런가……미안한 일을 했구나."
"후후, 모두가 처음엔 싫어했는데. 요즘은 과제일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니까."
"……이제 곧 끝나니까. 조금 쓸쓸해."
끝나버린다. 가을의 끝과 동시에 이 시간이 끝나버린다.
(쓸쓸해.)
마치 경고처럼, 그 말은 슈야의 마음에 울렸다.
"나도……그렇다."
바라면 안된다고 해도.
"나도 끝나는게 쓸쓸하다."
"슈야."
"지금이 끝나버리는게 쓸쓸해. 그래서 머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구나. 바라면 안되는데."
"…………괜찮지 않을까."
괴로워하며 중얼거린 슈야의 말은 맑은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끝나는게 쓸쓸하다고 생각하는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어째서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는거냐고 묻는 듯, 곤란해하는 웃음을 지으며 '극히 평범한 일이야.'하고 그녀가 말했다.
슈야에게 있어서 이 세계의 상징인 그녀의 미소는 마음의 아픔을 더 깊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말에 기쁨을 느꼈다.
"타카토라면 분명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끝이 곧 시작이라고 하니까 슬픈 것만은 아니야'라고."
"……오오, 타카토라면 그럴 것 같구나."
"리이치로는 감정적이지 않으니까, '끝난다고해도 과제가 끝나는 것 뿐이잖아, 졸업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할 것 같아."
"흠. 리이치로는 솔직하지 못하니까."
"후후, 맞아. 그리고 ……나카바는, 끝내지 않으면 되잖아! 같은 말을 꺼낼 것 같아. 마도카도 거기에 동조하고."
"끝내지 않으면……?"
"토라는……글쎄. 조금은 끝나는 걸 섭섭하게 느껴줬으면 좋겠는데."
나데시코의 말은 마치 봄의 태양빛같이 따뜻했다.
[――끝은 시작. 끝내지 않으면 된다.]
그것들은 어딘가의 이야기나 창작물에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문구였다. 그러나 저속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금 슈야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자, 빨리 가자."
소매를 붙잡혀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꿋꿋하게 선 그 등을 바라보고는, 슈야는 딱 한번 눈을 감았다.
"――나데시코, 나는 머물지 않는다."
떠올려버린 것이 있다. 하지만 머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끝은, 시작.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응? 뭐라고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가지."
창문 밖에 한 장의 잎이 떨어졌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가을은 급격하게 끝을 고하려하고 있었다.